2016년 7월 26일 화요일

양습전 주석 초벌

위략 가리전에서 말하였다. 왕사(王思)는 설제(薛悌)와 더불어 극가(郤嘉)와 함께 작게 일어서 따르니 벼슬의 직위가 대략 비슷했다(略等). 세 사람 중 설제는 유도(儒道)에 두루 통하여 살던 곳에서 이름이 한성(閒省)이라 불렸다. 극가와 더불어 생각하는 바와 일을 행하는 것이 서로 비슷했다. 문제가 조서에서 가로되 「설제는 순수하지 못한 관리(탐관오리)요, 왕사와 극가는 순수한 관리라. 각각 관내후(關內侯)를 내리니 그를 부지런히 갚으라.」라고 하였다. 왕사는 뭇 사람들이 비록 번거롭다고 여기는 효련문서(曉練文書)에서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자 생각의 형세가 기울어 모두 이로써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정시(正始) 중에 대사농이 되었는데, 연로하여 눈이 어두웠으며 성내며 노하는 것에 있어 절제가 없었고, 아래의 관리에게 시끄럽게 대하니 자연스럽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품은 믿음이 적었는데, 이때에 한 관리가 (자신의)아비가 병이 심하게 걸려 있어, 근처의 외사에 있게 하고 자백하며 휴가를 원하였다. 왕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며 성을 내며 말하길 「세상에 근심 있는 여자에게 병든 어미가 있다는 것이 어찌 이를 이르는 것이겠느냐!」라고 하며, 끝내 휴가를 주지 않았다. 관리의 아비가 다음날 죽었으나 왕사는 한스러운 생각이 없었다. 그의 각박한 류(類)가 이와 같았다. 왕사는 또한 성품이 급하여 일찍이 집필하여 글을 만들 때, 파리를 붓 끝에 모아두고 몰아서 가다가 다시 돌아오니, 거듭 이와 같았다. 왕사는 성이 나면 스스로 일어나 파리를 쫓는 일을 능이 할 수 없어. 돌아와 붓을 잡고 땅으로 던지고 밟아 망가뜨렸다. 이때 단양에 시외(施畏), 노군(魯郡)의 예의(倪顗), 남양의 호업(胡業)이 있었는데, (이들)모두 칙사(刺史, 자사를 말함)가 되어 군을 지키니 이때의 사람들이 그것을 가혹하고 난폭하다 여겼다. 또한 고양(高陽)에 유류(劉類)가 있어 재상과 태수의 벼슬을 지내며 그들(시외, 예의, 호업)보다 더욱 가혹하고 간악하게 하니, 선을 수양하는 사람의 일로써 세상에서 폐해지지 않았다. 가평(嘉平) 중에 홍농태수가 되었다. 관리가 200여 사람이었으나 휴가를 주지 않았고, 오로지 부릴 뿐이어서 급하지(혹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잘못에는 경중(輕重)이 없었고, 번번이 머리채를 잡았으며, 난장(亂杖, 잘은 모르겠지만 무작정 패는 것으로 짐작 됩니다)으로 때렸고, 끌어내고 다시 넣으니 거듭(數四) 이와 같았다. 이에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파서 돈을 구하게 하니, 살고 있는 곳의 시장과 마을 모두 구멍이 있었다. 또 외부로의 부탁할 때 간단하게 살피고, 매번 나갈 때, 드러내기는(혹은 양으로는) 칙독우(勅督郵, 칙서를 받은 지방 감독관)로 관속(官屬)들로 하여금 수양하고, 예절, 공경함에 있어 그릇되게 하지 않았으나, 뒤로는(혹은 음으로는) 오는 것이 없음을 알면 늘 성을 내며 그것을 중상모략하였다. 성품 또한 신의가 적었으므로, 매번 고관(大吏)을 보내어 나서게 하고, 늘 소리(小吏)들에게 뒤따르며 다시 살피게 하였으며, 한낮에는 항상 담과 벽 사이에서 스스로 조사하며 엿보았고, 밤에는 간(幹)으로 하여금 제조(諸曹)를 염찰(廉察)하게 하며, 다시 간(幹)을 믿지 않아 또 영하(鈴下, 시종군사라고 하는군요)를 보내어 노비에게 이르러 모양(혹은 접대원?)을 바꾸어 조사하여 알아보게 하였다. 일찍이 지역을 순찰할 때(案行, 안찰행), 묵으려 민가(民家)에서 멈추었다. 민가에는 두 마리의 개가 돼지를 쫓고 있었는데, 돼지가 놀라 달아나며 머리를 울타리 사이에 꽂아버리자 잠시 울부짖었다. 유류는 외부의 관리가 멋대로 함께 먹고자 하여, 안찰(案察)을 다시 밝히지 않고, 아첨하여 오백(伍百, 숫자인지 사람이름인지 잘 모르겠네요)으로 하여금 관리 다섯에게 아전 손약(孫弼)을 끌고 들어오게 하여 머리를 꺾고 책망하였다. 손약은 사실대로 대답함으로써 유류가 스스로 부끄럽고 좋지 않게 되자, 다른 일을 물어 핑계 대었다. 백성 윤창(尹昌, 혹은 민윤창(民尹昌))이 100세를 누리며, 유류의 출행(出行)을 듣고, 응당 길을 지나며 그 아이에게 말하길 「내가 부군(府君)을 맞이하는 것을 도와 달라. 내 은혜를 말하고자 한다.」고 하니, 아이는 윤창을 도와 길의 왼편에 있으며, 유류를 바라보고 꾸짖으며 말했다. 「이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우리가 와서 보게 한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무례하다고 보았으며, 모두 이와 같았다. 옛 풍속에 백성들이 수령을 헐뜯는 것은 세 번 수긍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므로, 옮김(천거되어 직분이 이동되는 것)을 생각하며 죽음과 벗어나고자 하였다. 유류가 홍농에 있을 때,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미워해 그의 문에 적어 이르기를 「유부군은 유삼불긍(有三不肯)이다.」라고 하였다. 유류는 비록 그것을 들었으나 더욱 스스로를 고치지 않았다. 그 후에 안동장군 사마문왕이 서쪽을 정벌하고자 홍농을 가는 길에, 홍농 사람들이 유류를 황모(荒耄, 어둡고 모자란 늙은이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에다 군의 재상으로써의 소임을 하지 않았음을 고하였다. 이에 불러들여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으로 삼았다.